능력이 없는 십자가와 그리스도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것이며 돌비에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것이라" (고린도후서 3:2,3)

구절은 명료합니다. 교회를 접하러 오는 사람들은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신령과 예수님의 존재를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나게 하려고 하는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의 자아가 죽고, 우리의 육신이 죽어서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하나님의 영을 위해 막히지 않고 흐르는 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계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복음이신 예수님의 열정을, 사도행전의 기적을, 성령님이 주시는 선물을, 요한의 글에서 표현되어지는 사랑을 그리고 또한 바울이 권고한 바로 잡아져야 점을 경험하여야만 합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외양적으로도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가서 종교적인 상투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은 우리자신과 모순되어 있지요. 우리의 영적인 생활 조차도 성경에 너무나도 많이 나타나 있는 형제에 대한 자비, 은혜, 그리고 사랑에 대해 부정을 하는 같습니다.

나는 목사님이 기독교인이 있는 가장 나쁜 것은 그들의 친구들이나 동료를 교회로 초대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말한 까닭이 그들과 친한 사람들은 그들의 생활방식을 알고 있다는 것이죠. 그들은 험담과 뒷얘기, 불평 그리고 신령과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들의 친구들은 그들의 상스러운 농담을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목사와 가족을, 게다가 자신들이 충실한 교인으로 인정되어지는 것을 항의하는 같은 사람들까지 집어삼키고 있을 , 같이 점심을 들곤 했지요. 그들은 상사를 비판하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지요.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으로부터 얻는 해방감과 자유를 제시할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울고, 춤추고 부르짖는 동안에, 어떤 사람들은 성직자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아직 그들의 생활이 변하는 것에 별다른 영향력을 주지 못해왔던 같습니다. 그들을 인도한다고 하는 성령은 그들의 행동에 하나님의 공헌을 끌어들이는 실패하였고, 그들이 전하는 말씀은 그들의 마음을 우리 구조의 마음으로 변화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대해 얘기 하지만, 우리의 삶은 십자가의 삶을 반영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에, 마약과 과장을 선전하고, 우리의 예배가 어떤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예배를 일시적 유행과 신화적인 것들로 위장 시킵니다.

우리는 모든 수단을 써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추구하고 받으려고 시도해왔었으나, 비참하게도 우리자신을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에 바치지 못하여 왔습니다.

위대한 아주자거리의 부활에서 예언자가 말하기를 영적교회와 순복음교회에서 우리는 충만을 느낄 것이다 라고 말했다 합니다. 또한 마지막 날에 교회는 순결을 권세와 바꾸고, 신실함을 유행과 바꿀 것이라 하였습니다. 데이비드 윌커슨이 "그리스도가 없는 순복음"이라는 메시지에서 그는 가까운 친구 사람에 의해 드려진 제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초대기간동안 저자는 권력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교회의 쪽에 줄을 서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순결을 원하는 사람들을 교회의 쪽에 줄을 서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권력 사람 순결 사람 꼴로 줄을 섰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의 수치입니다. 우리는 눈이 멀었으며, 현혹되어왔습니다. 순결이 없는 권력은 있을 없고, 자기희생, 죄와 자만이 없이는 청렴도 없습니다.

아주 안무된 , 음악과 가수의 조화와 아주 좋은 설교나 교훈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고 있는 것은 오랫동안 변화와 진실한 회개가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도전장을 보내고 변화 시키려는 하나님의 진실한 움직임은 모든 교회와 모든 예배에서 일상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메시지가 설교의 주제가 되었을 , 신도들이 신령함과 순결함으로 돌아가게 있고, 보통 그리 되어집니다.

부족한 십자가

사탄은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그는 그의 제국에 미칠 영향에 마음을 졸입니다. 그는 십자가에 대해 설교하는 자들을 멸시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는 십자가의 능력을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속임수를 씁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성직자들이 효력을 가지게 합니다. 그것이 없이, 인류는 하나님께 만족할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 구원, 치유, 해방이나 우리가 하나님께 추구하는 어떠한 축복도 있을 없습니다.

태초부터, 사탄은 십자가의 말씀을 없애려고 하거나, 기만하려고 해왔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무례하고 구시대적이고 불필요하다고 형식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가 없이, 우리는 그리스도가 힘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요즘에 한창 인기가 있는 어느 이야기에 의하면, 당신이 한번 거듭난다면 앞으로는 십자가가 필요 없다고 합니다. 구원은 죄씻음을 가져오고, 후에는 죄에 대한 것이 해결된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이상, 순복음으로 전진해야 하고, 하나님의 선물과 복음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들은 모든 성직자들이, 성령의 선물이, 그리고 순복음의 경험들이 십자가의 말씀에서부터 발생한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또한 말하기를 우리가 지금 구원 받으면 다음 단계는 윤택하고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배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들으세요., 십자가의 그늘밖에서의 윤택한 삶이란 없습니다.

백이십 명의 사람들이 다락방에서 나와 성령의 세례를 받고 방언을 하자마자, 베드로는 십자가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삼천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였습니다.

만일 사탄이 십자가의 중요성을 속일 없다면, 그는 다른 필요조건을 붙임으로써 십자가의 충분성을 흐릴 것입니다. 바울은 선언하였습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갈라디아서 6:12)

"물론 당신은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라고 갈라디아서는 얘기합니다. "그러나 외에 다른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또한 당신의 구원을 완성하기위해 할례를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전부가 아닙니다. 승리는 온전히 갈보리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는 충분하지 않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사정은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순복음교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는데, 그것의 핵심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고 해도 입으로 말하지 않으면 완전히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카톨릭에서는 어떤 성례전과 일들은 반드시 십자가의 복음을 동반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다음 말씀에서 바울은 할례나 십자가에 보태어지는 어떠한 것도 의미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단지 그것이 우리에게 허락하는 것은 육체의 영광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길을 걷는 것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속에서의 십자가의 목적입니다. 그것은 죽음과 자기부인, 그리고 모욕의 장소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기뻐했던 곳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복종으로 안에서 걷고 살아 감으로써 죄와 유혹을 극복하도록 십자가가 우리에게 은혜 안에서 말입니다.

만일 평범한 그리스도인에게 그들이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믿기로는 대부분의 반응은 이럴 입니다. "지옥으로 부터죠." 그러나 우리가 다시 거듭난 다음부터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육욕과 간음과 악용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있나요? 우리가 언제 부정과 거짓말과 도적질 등과 같은 것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적이 있었던가요? 이렇게 되려면 우리들은 십자가의 길을 매일매일 걸어가야 합니다.

사탄은 자기 것이 것은 그리 쉽게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는 우리들이 사탄의 재앙과 고통에서 치유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힘으로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것입니다.

죄는 구원으로 해결된다고 하는 주장은 신도들로부터 이상의 용서를 앗아갔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마귀의 끈으로 묶여져 버리고 마귀의 끈은 사람들에게 죄로부터의 진정한 자유를 절대로 허락하지 않게 합니다. 그들은 설교하기를 당신이 구원 받은 후에 죄를 짓는다고 해도 그것은 자동적으로 회개없이 용서 되어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실에서 참이나 동떨어진 것입니다.

그들이 죄의 노예로 빠져 들어갈수록, 그들의 마음은 경직되어갑니다. 그들의 찬양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들의 설교는 육체의 훈련이고, 그들이 있는 것은 단지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일로 기뻐할 따름입니다.

그들이 십자가에서의 끊임없는 관계를 원치 않음으로 인해, 그들의 그리스도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1;17,18)

진정한 주님의 능력은 십자가의 말씀으로부터 나옵니다. 그것은 공식이나 회의에서 찾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주장하면서, 믿는다고 하면서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전달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갈보리의 언덕으로 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할 있어야 하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죽을 있어야 합니다.

다른 필요조건을 십자가에 덧붙일 , 당신은 능력을 없애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의 좋은 예로 그리스도 철학과 정신의학과 같은 기독교관련단체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과학세계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은 많은 사람이 모일수록 이전보다 많은 문제를 가지게 되는 걸까요? 이유는 우리가 인간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으로서의 십자가를 버려왔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우리는 세속에 물들은 교회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있도록 세상의 것들을 주님의 복음과 섞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다른 이와 나누시려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능력을 기부하시지는 않으실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격이 어떻든 그런 것은 상관하시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면 그는 우리의 전부를 바꾸어버리십니다.

악마는 십자가의 희생으로 물러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공포, 육욕, 취함, 마약, 살인, 거짓말, 도적질 등과 묶어버리는 사탄의 힘을 파괴시키셨습니다. 십자가를 한번 만나면, 우리는 사탄의 사슬을 끊어 버릴 있게 됩니다. 십자가와 매일매일 함께하는 삶은 우리에게 영원한 자유를 것입니다.

만일 크리스챤 카운셀링이 100퍼센트 하나님 말씀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관계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감정적, 정신적, 그리고 영혼의 세계에서의 우리의 자유는 심리학, 정신의학, 우리자신의 의지력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와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한복음 10:1 & 3) 그것은 십자가이며, 이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십자가를 완전히 배제하라

십자가를 위한 궁극적 목적은 죄의 삯과 힘을 파괴함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사탄은 많은 사람을 속여서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성공해왔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에게 그들이 죄인이라고 믿게 함과 동시에 절망과 지옥이 결합하여 그들의 자아존중과 자아회복에 손상을 입히게 합니다.

크리스탈 대성당의 목사 로버트 스컬러 씨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이나 기독교주의 아래 이루어진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증명해온 것은 인간성에 더욱 파괴적이고 더욱이 복음전파에 더욱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 사감들이 그들이 잃어버린 것과 죄의 상태를 알게끔 의도하는 가공되지 않은, 투박한 그리고 기독교화되지않은 전략보다도 말입니다. 인간은 원래 악하지 않고, 단지 자신이 얼마나 선한지 모를 따름입니다. 죄는 자아존중의 결여입니다. (타임지 3/18/85)

스컬러씨는 죄의 치료제로서의 십자가에 애해 설교하는 것을 비하시켰을 아니라, 죄를 판결하고 십자가로 이끄시는 성령님의 일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고 이렇게 외치겠죠. " 나는 괜찮습니다. 당신도 괜찮아요."

인간이 선천적으로 악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십자가의 피의 희생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히브리서 10:28.29)

스컬러씨의 주장은 성경구절과 정반대입니다. 아직, 의심이 없는 기독교인들은 일요일마다 이러한 인간중심의 신학을 듣고 있습니다.

 

 

기다리면 계시를 받고 방황하면 속임을 당하리라

십자가를 이상하게 말하거나 십자가로부터 많이 벗어나는 모든 가르침의 뒤에는 마귀의 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지 않을 , 우리자신은 모든 종류의 구속에 활짝 열려져 있는 상태가 됩니다. 아틀란타에 있는 목회자인 스트롱 씨는 최근 그의 라디오 순서에서 어떤 연설을 했는데, 그것은 너무나 난이해서 다음의 구절을 자꾸 되풀이하게 만듭니다. " 교회가 하나님을 바라볼 , 그는 예언자를 보내십니다. 그들이 사람들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점장이를 보낼 입니다." 이것은 소위 "성령충만교회"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명확하게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나태해져 있어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필요함, 그리고 안전을 엎드려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빠른 결과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를 돕고 우리를 안정시키거나 죄를 덜어줄 있을 듯한 사람에게 달려갑니다.

인간은, 우리가 얼마나 우러러보건 간에, 답이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멍에는 쉽고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8-30)

우리의 모든 두려움, 문제들, 가슴 아픈 일들, 우리들의 모든 죄와 중압감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의 멍에만이 십자가의 앞에서 받아들여지고 보존됩니다.

사탄은 이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는 조용히, 참을성 있게, 고의로 우리가 십자가 밖에서 힘을 구하도록 하는 일을 꾸밉니다. 그는 요즘에 들어 해답을 구하기 위한 사람들의 관심을 인간의 힘으로 끌어 들이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힘이나 정의로 끌어 들여 많은 가짜 선생과 가짜 예언자들을 만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위험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사람이 당신을 위해 서서 "당신의 편지를 읽어 (당신에게 어느 누구도 모르는 것들을 얘기해)" 있거나 심지어 회복의 기적을 전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아무리 상상을 하려해도, 그들이 하나님의 예언자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태복음 7:15,16) 이렇게 믿음이 깊은 처럼 보이는 배우들의 열매는 밖으로는 영적으로 보이지만 항상 결과적으로는 폭동과, 혼돈과, 형제와의 결별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언자의 열매는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그것은 삶이 십자가 안에, 주변에 머무르는 사람들로부터 나옵니다. 형제와 교회를 위한 그들의 짐은 성령의 인도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이나 취향이 없이 진실을 전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많은 설교단을 만족시키려는 그런 아부꾼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주님 앞에서 이루며 흐느껴 울고 통곡하는 밤들을 가져옵니다.

사람들이 일어서서 외치기를 "이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말합니다."라고 , 그들은 잃은 자와 타락한 자들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아가게 하여 죄를 뉘우치게 하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쓰임 받은 영광의 배입니다. 그들은 갈보리의 피흘림으로부터 진정한 , 열정과 인도하심을 받아 정의로운 사람들이 계속 존재하도록 힘을 북돋아 줍니다.

십자가가 없어진다면 다른 무엇이 있을까요

목사들과 그들의 성도들이 십자가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거부하면, 길은 하나, 하락의 길이 있습니다.

사탄이 성공적으로 (십자가의) 진실의 기초를 축출하는 것에 성공을 거두어온 교회에서는 종교적 대체물이 적어도 조직을 하나의 교회로 나타내기 위해 협력해 옵니다. 그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끌어 들이거나 기존에 있는 사람들을 유지하는 이외에는 다른 곳에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여기에 사탄의 새로운 교리들이 있습니다.

*현대화

*자기존중

*기독교 심리학 & 정신의학

*믿음 & 번영

*내적치유

십자가가 제거되어지면, 모든 학설이 인간중심이 되어버립니다. 자기부인, 죽음이나 수치 등이 거론되지 않고 그렇게 됨으로써 십자가는 능력을 잃게 되고 맙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냥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해서만 얘기를 해주세요. 그의 사랑, 자비, 은혜와 축복에 관해서 말이예요. 우리는 고통과 박해와 심판에 대해서는 듣고 싶지가 않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소식을 예언해 예언자를 보내 주세요. 우리는 그의 계승자고 왕의 자손이니 우리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요구하는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십자가가 없으면 왕관도 고통도 없고, 영광도 심판도 없으며, 승리 또한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로부터 등을 돌릴 , 우리는 모든 영광과 자비의 소망 조차도 뒤로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부터 모든 축복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말씀을 거부할 , 우리는 한마디로 우리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장사를 지낸 다시 부활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모든 원리와 학설은 이것이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복음이며, 마귀의 원리입니다.

만일 우리가 요즘 많이 퍼져있는 잘못된 원리의 유혹에 빠져들게 된다면, 우리는 불균형적인 신을 나타나게 것입니다. 특히, 순복음교회와 영적인 교제 안에서 말입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예배를 강조하는 것을 성령에 두고 있습니다. 그것이 속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두기보다는 말이죠.

년전에, 나는 어느 복음자로부터 매달 테잎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내용중 하나에서, 주최목사는 복음자를 소개했고 그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죠. "그에게 성령의 박수를 드립시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들이 없다면 예수님의 박수라도 줍시다."

이것은 성경말씀이 얘기하는 예수님과 성령님과의 관계와는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을 , 성령님은 비둘기의 형태로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초점은 양에게 맞추어져 있었지 비둘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힘이 부여될 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도록 말씀하셨습니다. 힘이라는 것은, 예수님에 의하면, 그것으로 인해 그들이 예수님의 증인이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것처럼, 성령의 전반적인 기능은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고,. 대중들은 메시아에게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찬양이 돌려지는 다른 신이 아닙니다. 그의 일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를 영광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하기위한 메시지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 회의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성령의 회의란 무엇입니까? 성자들이 춤추고 외치는 곳입니까? 그들이 혀로 말하고 예언하는 곳입니까? 아닙니다! 그곳은 그리스도에게 영광이 돌려지고, 성령에 의해 참석한 사람들이 자신을 뉘우치며 자신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가까이 가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는 곳입니다. 그곳은 예수님이 우월성을 가지시는 곳이기도 합니다. 성령의 회의는 하나로, 하나님의 말씀이 음악으로 인해 높여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비추어져서, 용서하지 못함과 미움과 험담과 쓰라림 그리고 죄를 파괴하도록 하는 곳입니다. 다른 것들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높이 있는 , 얼마나 크게 소리 있는 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의 예배가 참석한 사람들의 본질을 바뀌게 하지 못하고 성령과 예수님의 순수 안에서 걷고자 하는 같은 바람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령의 회의를 가져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을 슬프게 하는 회의라고 하는 편이 나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예수님에게 영광을 드리는 것으로 인도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능력이 없는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여태 피력해 왔던 것입니다.

십자가로부터 달아나지 말아라

"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가복음 9:23)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4;27)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기본 조건은 자신을 부인하고 그의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겉으로는 사도 바울보다도 영적으로 보이지만 한번도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그들의 십자가를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하는 자리에서 파수꾼이 예수님을 잡아 눕힐 , 베드로는 칼로 공격하여 파수꾼의 귀를 베었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예수님이 12사단의 천사를 불러서 그에게 운명의 시간이 주어지도록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완전한 복종으로 하나님의 소망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였습니다. 이것이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상 우리의 협의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 받거나 영광 돌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방식, 방법, 동기 등은 뒤로 미뤄져야 합니다. 우리는 갈보리에서 우리를 위한 그의 의지가 무엇이었던가를 발견하고 정확하게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어떤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성령에 의해 보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박힘을 당한 생명은 알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이것에 대한 증거는 자연히 따라올 일과 과실을 인도하는 성령충만에 있습니다. 만일 과실들이 하나님께로 영광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름을 얻지 못한 것과 같으니 십자가로 돌아 가야합니다.

십자가의 삶은 육체에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완전한 굴복이며 전체적 희생입니다. 그것은 고통스럽고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말합니다. "주여 당신에게 해로운 것은 모두 잘라서 버리시옵소서. 나의 죄를 나타내시어서 벌하시옵소서. 나는 내가 아니니, 나를 죽을 사람으로 여기어 주소서" 세속적인 교회 사람들은 이것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사탄은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모든 수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와 동일시 되어지는 다른 것은 있을 없다고.

우리가 십자가를 떠나 영의 범위안에서 " 크고 나은" 것으로 나아갈 우리는 복종에 의해 요구되는 희생을 거부하고 그것을 가짜로 교체해 버립니다. 만일 우리가 영적인 삶의 오직 하나의 진정한 근원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비정하게 것이고 나아가 십자가의 적이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와 그의 관계를 빌립보교회에서 설명할 그는 삶이란 자신에게서 벗어나 예수님으로 가득 채우는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가 소유한 모든 , 그가 되려고 했던 모든 , 그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 힘써 왔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우리로 본을 삼은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내가 여러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빌립보서 3:17,18)

예수님이 그들의 구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번일요일에도 사실을 선포하는 사람들로 가득찬 교회들이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그들은 하나님의 영역과 부활에 대한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월요일 아침에 그들의 승리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십자가를 선택하기 보다는 피해갈 것입니다. 십자가로부터 도망갈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그들의 비즈니스 계약 관계에서 비밀스러운 죄로 나타날 것이고 그들은 다가와서 울부짖을 것입니다. "여기에 나의 주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의심을 합니다. " 내가 승리할 없는 것입니까? 내가 이런 것들을 이겨낼 없습니까?"

십자가는 매일 짊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살도록 육체를 변화시키는 신중한 노력과 행동을 하여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 위에 살고 있다면, 적군이 공격을 적군은 하나님 손에 맡겨지게 됩니다. 베드로와 욥은 하나님의 개입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보호를 거부하고 죄의 즐거움에 싸여있습니다.

데이비드 윌커슨의 가장 최근에 나온 "선교 이야기" 라는 소식지에서 당신의 운명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삼손, 사울 그리고 비참하게 홀로 죽음을 맞이한 솔로몬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번 축복을 받고 신의 임무를 위해 굳게 쓰임을 받았으나, 자신들의 즐거움과 의제를 추구하려고 십자가를 떠나서 신의 은총으로부터 잘려져 나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기로 하고서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확정 받는다는 자만심에 가득찬 그런 목사들을 우리는 개인적으로 얼마나 많이 보아왔습니까? 십자가에 삶을 바치고 성경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임무를 감수하는 보다는 자신들의 자산을 유지하려고 회의를 주선하는 복음의 전도사들이죠.

모든 기독교인들은 전도에 관계되어있건 아니건 간에 십자가 앞에 부름을 받는 다는 것을 아실 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십자가에는 많은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창은 열려져 있습니다. 창으로부터 모든 축복, 방향, , 명령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가 받아야 하는 징벌 등이 나옵니다. 그것은 갈보리에서만 찾을 있고 보존되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곳입니다. 우리의 모든 적들이 있고, 우리의 죄를 사함 받고 우리의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는 그런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고 우리에게 창문을 열어줄 용의를 보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그가 우리를 마귀에 의해 조작된 친구로부터의 모욕이나 죄의 유혹에 포기해 버리는 그런 사람으로 여기고 계시던 가요?

"하나님 당신에게 부끄러움이나 당황스러운 존재가 되기 보다는 당신이 생명을 가져가시길 원합니다." 라고 말할 있습니까? 여러분은 십자가를 우러러 만이, 고통과 번뇌는 그곳에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을 만이 그런 말을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내가 그의 고통과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가 그를 그곳으로 보냈고, 우리의 죄과는 정리되고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유일한 삶터로 유일하게 예수님과 함께할 있는 안전한 장소로 우리는 십자가를 떠나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 입니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에 기꺼이 머물기를 원한다면 고통, 댓가나 부끄러움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고치시도록 한다면 유혹에 맞서시도록 한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스가랴 13:1)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바친다면, 그는 용서와 치료와 해방의 샘을 열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와 사악을 깨끗이 것입니다. 신실함과 정의 안에서 그의 앞에 나아가 우리가 걸을 있도록 우리의 불완전함과 더러움을 없애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기독교인 생활에 있어서 주요 초점이 되어야만 합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다음으로 중요하며, 이러한 신실함 없이는 다른 것은 모두 영적 삶과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이란 십자가에서만 찾을 있습니다. "다른 모든 " 노래에서도 말해주는 것처럼 "가라앉는 모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