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가지 제목의 위험한 기도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12)

전에, 우리 교회의 종파의 사절단을 목사들에게 보낸다는 뉴스레터를 읽고 있었습니다. 뉴스레터의 부분이 기도의 내용으로 할당되어 있었는데, 제목이 { 하이벨즈의 다섯 가지 제목의 위험한 기도}이었습니다.

기도의 대부분은 (me) 중심이 되는 주님의 옥좌를 나타내고 있었고, 하이벨즈는 다섯 가지 단어를 나열했습니다. 다섯 가지의 단어들은 나로 하여금 우리의 기도생활과 하나님에게로의 관계를 바꿀 있게 한다고 믿게 하였습니다.

내가 다섯 가지의 "(me)"라는 단어를 연구했을 , 나는 단어들이 하나님의 존재로 향한 일종의 탐험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나의 생명과 복음을 위해 내가 주님의 의지를 찾고, 완전히 그에게 나를 맡기는 도전이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나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그와 다른 자들에 대한 생각과 동기를 드러내게끔 되었습니다. 안에서 신령함과 헌신, 그리고 주님과의 친밀함에 대한 새로운 열정이 일어났습니다.

다섯 가지의 "(me)" 로마서12 말씀과 접속되어 깨달음을 줍니다. 마음으로부터 기도 드리고, 행동으로 옮겨졌을 , 우리는 살아있는 희생물이 된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하나님에 의해 그의 목적과 그의 기쁨을 위해 쓰임이 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알게 됩니다.

나를 살피소서(Search Me)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편 139:23,24)

"거의 모든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적이 많습니다. 다윗은 느낌을 시편139장에 표현하였지만, 갑자기 그는 그것을 멈추고 하나님께 그를 시험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같은 식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혼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을 지적하시도록 요청해야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다윗의 눈물은 오늘날의 많은 교인들이 흘리는 것과 그리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향해 노래를 부를 ,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바람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이스라엘의 왕의 운명은 하나님을 따르도록 정해져 있었으며, 그렇게 때에 그는 그의 속에 죄악과 같은 모든 것들은 없어져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주님과 그의 말씀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내가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에 대해서 많이 깨닫게 된다는 것이 나의 경험이었습니다. 내가 그의 신령의 빛에 가까이 갈수록, 많이 성령님이 내가 완전히 바치지 못한 삶의 주위를 돌아보게 하시게 합니다.

시편139편에 있는 다윗의 말들은 속삭임의 마음으로부터 넘쳐 나옵니다. 믿는 자들을 위해, 찬양은 문을 마음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향해 열립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초점은 얼마나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지, 얼마나 우리가 그를 필요로 하는 지에 맞추어 집니다.

찬양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사랑에 응답하게 하여줍니다. 야고보서 48절의 말씀은 우리에게"하나님을 높이라 그러면 그는너희를 높이리니"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어떻게 그렇게 있을까? 나는 경험으로 이러한 것이 내가 찬양 드리는 동안에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찬양하는 동안에는, 내가 드리는 예배의 부분은 대개 하나님이 자신을 신령의 선물을 통해 증거하시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그의 존재를 많이 갈망하는 기독교인들은 찬양으로 감동 받습니다. 음악은 이상 즐거움을 위한 쇼가 아니라, 하늘의 왕실로 향하는 매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숭배의 구체적 표현과 말들은 어떠한 종교적인 제사를 지내기 위함이 아니라, 중의 왕이신 주님을 위한 그들의 극적인 사랑과 숭배를 나타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예수님께로 이끌려져 있기에, 그들은 계속적으로 그를 찬양하는 것에 방해되는 일들을 끊임 없이 알게 입니다. 찬양하는 자들은 그의 목소리와 그의 손길에 민감하여서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훼방하는 것은 어떠한 것도 참으려 하지 않을 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솔로몬의 것과 같습니다.

"바위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얼굴을 보게 하나 소리를 듣게 하나 소리는 부드럽고 얼굴은 아름답구나. 우리를 위하여 여우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아가 2: 14. 15)

주님에게 있어서, 찬양하는 자는 그루의 포도나무 입니다. 요한복음15:1 – 8 절에 나오는 포도나무와 같이, 하나님의 안에 있는 포도나무는 양성되어질 있고, 그를 영광스럽게 하기위해 사랑으로써 가지 치움을 당할 있습니다. 영광은 포도나무가 제철에 맺는 부드러운 과실로부터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또한 마태복음13장을 보면, 우리의 삶은 과실을 맺도록 전적으로 바쳐져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직함이나 학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쌓아온 업적이나 우리가 받은 상에 기초를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과실이며 우리를 통해 내려온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이고 본질이십니다. 우리가 그에게로 점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의 영광이 점점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 우리를 위하여 여우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아가2:15)

솔로몬이 말하고 있는 것은 " 여우들을 쫓아내라. 작은 죄들과, 우리가 간과하거나 변명으로 피하려 하는 부패들을. 우리로부터 그리스도안에서 성숙함을 빼앗아가는 부정행위와 범죄들을..

그들은 하나님과 우리들의 교제를 훔쳐갑니다. 그들은 우리의 눈과 판단능력을 흐리게 합니다. 우리의 귀는 그의 목소리의 달콤함에 무뎌집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기회를 가질 있도록, 그들은 반드시 노출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진실한 찬양은 마음 깊은 곳에 전달되어야만 합니다. 다시 한번, 야고보서 4장을 보면 우리는 신실함으로 주앞에서 우리자신을 보이도록 권고를 받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야고보서 4:8-11)

나를 깨우소서(Break Me)

" 당신은 깨침을 요청할 때까지 사람의 크리스챤으로서 성장할 없습니다. 당신의 정신적 성숙함의 정도와 상관없이,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작용하는 범위가 있기 마련입니다." (빌하이벨즈)

믿음이 깊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안겨준 며칠사이에 Church of Jesus Christ교단에서는 이단적인 현상들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또는 때로 죄를 깨닫는 것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느 일요일 크리스챤 네트워크에서 방영되는 교회의 예배를 시청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는 예배가 끝날 초대의 말과 함께 교회의 믿음에 관해 설명을 하면서 시청자들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중에 한가지 나의 영혼에 충격을 것이 있었습니다. 그가 시청자에게 "당신은 지옥불에 관한, 지옥의 유황에 관한 메시지를 설교단에서 다시는 듣는 일이 없을 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악에 대해서 걱정할 없다. 우리가 오직 이야기 것은 하나님의 긍정적인 면이다. 이것은 균형이 맞지 않는 메시지로 하나님은 이것을 추악한 일이라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70년대 , 나는 강림교 종파가 아닌 교회의 청소년부 목사였습니다. 우리 그룹은 천문12궁의 징조와 별자리 점에 관해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룹에 있던 소녀가 어떤 식으로 매일매일 신문에서 별자리 점을 보는지 얘기 했습니다. 그녀는 질문을 당하고서는 그것들을 진짜로 믿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것은 단지 심심풀이 였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외치고 있었다, 일종의 마법을 깊이 탐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마술을 깊게 탐구하고 있던 거라고 들었을 , 그녀는 우리가 지금 은혜 속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은 구약에서 자신이 행한 것과 같은 죄는 관여하지 않으신다고 외쳤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처하지 않을 것이라면, 혹은 우리가 하나님이 얼마나 죄악을 싫어하시는 지에 대해 어떠한 형태로든지 잘못생각을 하고 있다거나, 또는 우리가 자비를 죄악의 핑계거리로 잘못 사용하거나 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됩니다.

우리의 불복종은 하나님을 몹시 화나게 만듭니다. 우리의 반항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가까워짐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그의 신부라고 언약하고 다른 연인과 함께함으로써 하나님을 등지고 부정을 저지르겠다고 말할 있겠습니까?

어느 목사는 회중에게 어찌하여 사람에게 있어서 경배와 찬양하는 것이 그리 힘든지에 대해 설교를 하면서 정곡을 찔렀습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 사이에 우리는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거나 인식하지 못하고 속세로 가득차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HBO, TMC, Cinimax, MTV, 그리고 드라마 등으로 가득차게 하여 우리의 가슴은 점점 무뎌지고 딱딱해져 가는 것입니다.

야구, , 그리고 사교행사 등은 주중에는 성경공부나 기도를 제치고 우위를 차지합니다. 우리가 일요일 아침에 교회에 오면, 우리는 우리의 손을 들고 어떤 찬양이나 경배를 외치지만, 그것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놋쇠그릇처럼 그토록 값어치 있는 것이지요.

이것에 어떤 의혹이라도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의 보좌사이에 벽을 만들어왔고, 우리는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안에 있고, 그것이 우리를 그의 존재로부터 갈라놓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망과 어둠을 당연시하여 왔습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대답을 갈구하지도 않습니다. 만일 어떤 이유로 아내가 나에게 얘기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런지 알고 싶을 겁니다. 나는 내가 어떻게 행동해왔었는지를 찾아내고 싶고 상황을 고칠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의향이 있을 입니다. 이유는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다음으로, 그녀는 나의 인생이나 다름없습니다. 나는 우리 관계를 걱정하며 바깥에 있으면서 안을 들여 보기만 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여러 마음이 상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나의 행동이나 나의 말이 그녀를 다치게 하고 마음 아프게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울면서 그녀에게 용서를 구한 적이 여러 있습니다. 그녀는 항상 나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우리의 관계에 틈새를 일으키는 일들을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녀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부드러운 마음은 아플 때가 있는데, 그때는 마음이 하나님을 화나게 했다는 것을 알게 입니다. 이러한 마음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있는 마음을 방해하는 것들을 나타나게 하도록 요구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조건 없는 용서를 받는 신앙인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가 회개의 단에서 만나시는 사람들입니다.

"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34:18)

예수님은 그를 구하는 마음이 있고 하나님을 화나시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과 멀리 있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아픔과 상심을 알고 계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때문에 자신을 낮추어 왔으며, 그들만의 바람과 생각을 자신들로부터 없어지도록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알며 그들을 향한 예수님에 민감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왔을 , 그는 그의 헌신으로 다가오셨습니다 . 히브리서는 헌신의 의미를 "자유롭게 " 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찬양하는 자유, 봉사하는 자유, 하나님 앞에서 경건의 삶을,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자유.

주이름을 외치는 , 우리들은 우리를 우리의 죄로부터 떨어져 나가도록 주께 통곡으로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성경에서 약속하신 그의 존재와 자유를 얻을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나를 성장시키소서 (Stretch Me)

" 기도는 당신이 정신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할 드릴 있는 기도입니다. 만일 당신이 사랑이 깊고, 정신력이 굉장히 강한 사람을 알고 있다면, 사람은 아마도 하나님에게 그를 인생의 역경을 통해 자신을 긴장시켜 것을 요청해 왔을 입니다." ( 하이벨즈)

긴장된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한계이상의 영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어떤 것을 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된다고 기대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한계 이상의 영역에 있어야 합니다.

내가 젊었을 , 친구 중에 명과 나는 정기적으로 아령이나 역기로 운동을 했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의 신체적 힘과 기를 기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식사는 우리의 건강과 근육신장에 도움이 된다고 알고있는 음식들 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힘과 성장을 원한다면 그것은 밤사이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까지의 노력이 필요했으며 고통이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빨리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 몸의 상태는 소망하는 생각에 의해, 긍정적인 고백이나 우리를 격려하면서 근육을 자랑하는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에 의해 바뀔 없습니다.

역기의 무게를 늘릴 때마다, 우리는 근육이 늘어나고 찢어지는 것의 반복횟수를 늘릴 것입니다. 우리가 숨쉴 , 산소가 우리의 혈관으로 들어가며, 우리가 역기를 공중으로 때마다, 피는 우리의 근육 속으로 밀려들어가지만 근육은 늘어나서 성장할 입니다.

후에, 운동과 식사조절로 인해 우리의 몸의 지방 상당량이 사라졌고, 근육이 커지고 두드러짐을 쉽게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정신적인 영역에는 그리 변화를 주지 못하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면, 우리는 반드시 스트레치 되어서, 우리의 한계 이상의 수준에 도달해 있어야만 것입니다. 역기를 드는 것에

사용되었던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의 식단은 반드시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의 음식, 일용의 빵은 하나님 말씀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되는 음식이며, 우리는 그것이 없으면 제대로 기능을 다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초가 되지 않는 , 우리는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이룰 없습니다.

목사로서, 나는 하나님 말씀 안에서의 신도들의 인생에 대해 궁금증을 느끼는데, 특히 월요일 아침 비어있는 교회 제단주위를 걸으며 며칠 전부터 교회의자에 놓여져 있던 많은 성경책들을 입니다.

사람들은 내게 묻습니다. 자신들의 속의 어떤 일부분에서는 승리하는 일이 없냐고,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응을 합니다. "얼마만큼 많은 시간을 당신은 말씀 속에서 지냅니까?

일반적으로 대답은 " 충분한 정도는 아닙니다" 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찾게 달라고 울부짖고 그들의 때문에 상처 입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유혹과 시험동안의 그들의 능력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편119:11)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쓰여진 글귀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는 글귀의 능력, 진실을 가르치고 그를 초자연적이고 영생의 길로 인도하리라는 능력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선지자들을 내쫓거나 사람들의 모임으로부터 도망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말씀 속에 세웠습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주의 말씀은 발에 등이요,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119:103-105)

2.우리는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이상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것은 단지 믿음과 함께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긍정적인 생각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도 손을 내미는 것만으로 우리를 그렇게 되게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자체가 커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옷장 속에 가두고, 가장 높은 면류관의 방에 도달할 때까지 곳에 머물러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의지를 알아내야 하고, 어떻게 속에서 걸으며 살아가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마음과 그의 분산되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주와 함께하는 시간들이 우리에게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일상과 타협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내가 그를 알지도 모릅니다" 라고 외쳤을 , 그는 알았습니다. 이렇게 나타내는 것이 그의 비밀스러운 옷장 속에서만 얻어질 있다는 것을.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붙잡혔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제사장들과 유대교인들의 모임인 평의회에 불려나갔고, 곳에서 바울은 그가 전날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했던 곳들을 말하였습니다. 평의회에 모인 사람들은 사람들을 두려워 했기에 그들은 도모하기를, 사람을 위협하고, 이상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하지 말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들이 풀려난 후에 그들은 친구들에게 이제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전부 전하고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베드로의 기도는 우리가 요즘에 듣는 그런 기도의 형태가 아닙니다. 그는 박해가 그치기를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귀를 꾸짖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복음전파를 위해 하나님께 천사의 무리를 보내어 자신들을 보호하여 주시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원하였던 것을 들어봅시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사도행전 4:29)

우리에게 예수님을 끊임 없이 전할 있는 당당함을 주시옵소서.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를 성장케 하셔서 우리가 당신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소서. 우리를 인간의 한계이상으로 성장시키셔서 우리가 박해를 견디고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가져올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그들이 사도행전 5:40 – 42에서 간증한 내용입니다.

"… 그리고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나를 이끄소서(Lead me)

"하나님께 당신의 삶을 이끄시도록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가 무엇을 원하시든 위험을 감수하고 수행하십시오. 우리를 위한 그의 계획은 우리들의 계획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 하이벨즈)

로마서 12장의 시작구절은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하도록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1장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그에게 내놓기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헌금이 의미하는 것을 선물로 자랑하는 사람은 그의 권리, 지위 그리고 그것에 대한 관심을 잃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그것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오직 고린도전서 6:19.20만이 우리 안에서 실행 되어질 있을 것입니다.

"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나를 이끄소서"라는 제목의 기도를 깊게 생각한 끝에 알아낸 것은 길은 항상 하나님께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우리를 이끌어달라고 기도드릴 , 그는 우리를 완벽하게 그의 곁으로 돌아오도록 이끄십니다. 어떤 문제점이나 어떠한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스스로를 찾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을 위해 기도할 , 성령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랑으로 인도하십니다.

다윗왕은 그의 적군들 때문에 울부짖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목전에 곧게 하소서" (시편5:8)

우리가 쉬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적군이 우리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얘기를 일일이 듣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비틀거리고 쓰러트리기 위해서 그들이 사용할 있는 것은 어떤 것이든 보고 듣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 나를 정의로움으로 인도하소서." 다시 말해서

" 주님 나를 하나님과 친밀케 하시고, 당신의 말씀과 인도로 나를 채우소서. 그리하면 내가 당신을 욕보이고 불경한 말을 하지 않도록 하겠나이다. 오직 자상함과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보이겠나 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적을 그가 우리를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예수님이 하시듯이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하지 않는다면, 성경에서 이르기를 괴로움의 샘이 우리 안에서 솟아나와 우리를 예수님의 자비로부터 갈라놓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전도하고, 하나님의 절대 복음 안에서 살겠다고 맹세한 우리들은 모두

적을 만들고 것입니다. 그들 중에 우리가 알고 있는 몇몇의 사람들은 어둠 속에 계속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44절에서 우리에게 이르시길 사랑하고, 축복하고, 선한 일을

, 핍박하고 우리를 악용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하십니다. 이것은 너무나 많은 크리스챤에게 견디기 힘든 과제였습니다.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용서를 우리를 노하게 만든 자들에게까지 베풀어야 한다고. 만일 우리가 자비를 구하면, 자비를 전파해야 한다고.

기도를 때마다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 나의 적을 위해,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는 용서를 고의적으로 나에게 해를 입히려 사람들에게 베풀고, 하나님께 나와 나의 가족들에게 죄를 행한 자들을 방관하지 않으시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나는 많은 자들에게 가서 그들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온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시편 25:5)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하겠다고 선언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우는 것에 쓰임 받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교회에 범람해오는 새로운 유행이나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이거나 관심조차도 가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찾는 아니라, 그들은 2천년 전에 갈릴리의 바닷가를 거니시던 예수님을 울며 애타게 찾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이 섬기던 하나님을 말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어떻게 희생하며, 우주의 창조자의 존재 안에서 어떻게 자신들을 낮출 있는 지에 대해 알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진실 안에서 이끄시고,,,,,"라고 기도할 ,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가리워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진실이요, 그에 관한 모든 것이 진실입니다. 그의 방식, 그의 계율, 그의 명령은 모두 진실입니다.

"….. 그리고 나를 가르치소서" 당신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만 아니라, 그것들과 함께 세상이 나를 통해 당신을 보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가르쳐 주소서. 어떻게 하면 당신의 사랑이 안에 흐를 있는 지를 가르쳐 주소서. 어떻게 하면 내자신이 악한 것과 가까이 하지 않을 있는 가르쳐 주소서. 내가 하여야 것과 당신이 나를 가득 채우게 있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지를 가르쳐 주소서. 왜입니까?

" 그것들이 나의 구주이기 때문이니라" 만일 예수님이 우리를 구했다면, 만일 그가 그리하도록 우리가 허락했다면, 그는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그의 해방으로, 그의 치료로, 그의 진실로 이끌어 우리는 그의 이름에 영광을 돌릴 있을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길을 지도하시리라." (시편 3: 5,6)

나를 쓰임 있게 하소서 (Use Me)

"너희 자신을 유용하게 하여 그가 너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감화할 있게 하는 것은 매우 흥분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는 모험을 만들어 냅니다. " ( 하이벨즈)

하나님에 의해 크게 쓰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찾고, 깨우치고, 성장하고 이끄는 과정들을 거쳐야 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은 우리를 유용하게 만드는데, 그것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명을 위한 그의 부르심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을 통해서만 완벽해 있습니다.

모든 성경말씀을 통해 위대한 사람은 그들 앞에 놓여진 시험을 위해 준비되어지기 위해 하나님과 함께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아니라, 거의 모든 때에 그들을 통해 예수님이 어떠한 일을 완수하시도록 필요한 것들이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변화되고, 가르침을 받고, 단련되기 위해 멀리 황량한 곳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는 옹기장이이고, 우리는 흙입니다. 만일 우리의 가슴에 남은 인생을 위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바칠 목적이 있었다면, 우리는 그가 우리를 변화 시키고, 우리의 형상을 만들도록 허락할 입니다. 우리는 그가 모든 불완전함을 없애고, 모든 깨지고 흠집이 것을 고쳐주시기를 간절히 바랄 입니다. 우리는 그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창조되었으며,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그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나는 생각하기에, 모든 목사들은 그들 자신에게, 그리고 하나님에게, 사람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를 늘리는데 쓰이도록 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지 질문을 왔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대부분은 한번도 하나님이 유용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을 인도하도록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랬다면 가지 일이 우리의 속에서 매우 명백하게 되었겠지요. 우리는 참여하게 되고 고백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사람들이 되고 대부분은 보여지는 뒤에는, 일하는 사람들과 기도의 전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속의 곳을 위해 수를 쓰거나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안에 그들이 곳을 찾았고, 또한 그들의 지역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의 초점은 그리스도에게 있고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모든 것에 있습니다. 그들은 다음 과제를 기다릴 없습니다.

주님에 의해 쓰임을 받는 크리스챤들은 이상 단순한 말의 청취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말을 진정으로 행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기독교란 단지 일요일날 아침 열광하여 환성을 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교회건물의 벽을 넘어 너머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교도소, 병원, 길거리의 부랑자 그리고 그들의 이웃에게 전달하여 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을 밤중에 깨우셔서 친교하고, 교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복음을 전파할 있는 모든 기회를 잡는 것입니다. 만일, 어떠한 기회도 없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기회를 만들 것입니다.

아직도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회중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난 일요일 오전 텔레비전에서 목사가 말씀을 전하는 것을 듣고 있었는데, 그는 이때가 교회의 전성시대라고 하는 소릴 들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일년 새롭게 시작하는 교회보다 문을 닫는 교회가 많은 것일까요? 목사들이 일요일 저녁예배와 수요일 기도회를 중단하고 있습니까?

이때야 말로 최후의 날들입니다. 성경구절에서는 명백하게 이르기를 많은 자들이 믿음에서 멀어질 거라 하였습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마태복음 24:12) 인터네셔널 해석성경(NIV) 조금 명확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교회의 전성시대 입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이것은 교회역사상 가장 위험한 시대 하나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한 열정을 세속에 물들은 사람을 위한 설교와 프로그램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의로움 대신에 부를 쌓는 잘못된 원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혼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회개와 신실을 타협의 여지도 없이 설교하고 사람들이 율법자나 예언자가 되어 버린 조롱 받고 놀림을 받습니다.

이것이 실지로 교회의 전성시대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최고수확을 위한 수도 있습니다. 수확하기 전에 들판은 하얗습니다만, 그러나 교회들은 문을 닫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는 과거의 어느 역사상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실종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얘기해 주기를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앉아서 어떻게 하면 부유하고 안락하게 있는 지에 대한 설교를 듣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래야 합니다. 지구상에서의 우리의 시간이 끝났을 , 사도 바울이 했던 증거와 함께 떠날 있다고.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디모데후서4:7 )

이러한 생을 마감하는 교회멤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뒤로 마치지 않은 일을 남겨두고 떠납니다. 바울의 인생은 하나님에 의해 쓰임 받았습니다. 그리스어 "dromos"라는 말은 번역하면 변화된 노선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경기에 비유됩니다. 그러나, 은유적으로 직업이나 부름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지시하신 대로 그런 사람이 되었고, 나는 그가 내게 명령한 모든 것을 해왔습니다. 지금 경기는 끝나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 그와 함께 있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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